정말 미안하다. 이 글은 어쩔 수 없이 혐짤로 시작해야 한다.

지금의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오송분기역 사태'였다.
당시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던 나는, 말도 안되는 정치논리로 상황을 장악해 버린 이들(이른바 '충북세력')의 이전투구의 극치를 보아야만 했다.
이 사태로 인해 호남고속철도를 이용하는 이들은 책임져 주는 이도 없는 상황에서 수많은 시간과 금전을 낭비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건설교통부 장관 추병직은 2005년 8월 22일, 오송분기로 인해 우회하는 거리에 대한 추가 부담은 없게 하겠다는 말을 국회에서 뱉고서는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았다.
그렇다. 오송분기역 사태로 인해 우회하는 편도 19km, 그리고 5800원에 대한 책임을 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이전 게시글에 있던 링크를 다시 가져온다. 아직도 피가 거꾸로 솟을 수밖에 없는 발언이다.
◯최인기 위원
알겠습니다.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요.
두 번째로 호남고속철도 분기역 문제는 지난번에 건설교통위원회를 한 번 소집해서 하겠다고 하다가 정부 여당 간담회로 대체를 했든가 해서
저는 민주당이기 때문에 어찌 됐는지 뒤에 얘기도 못 들었습니다마는, 어찌됐든 그 결정의 문제에 대해서 몇 가지 지적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정부에서 그동안 다섯 차례의 연구 용역이 있었습니다. 90년 국토연구원에서 호남선 고속전철화사업 타당성 조사, 94년, 97년도에 했었던 호남고속철도 기본계획, 99년도 21세기 국가철도망 구축 기본계획, 심지어 2003년 11월에 건설교통부가 호남고속철도 건설 기본계획 조사 연구에서조차도 천안아산역을 분기점으로 하는 것이 국토 전체 발전상 옳다라고 결론이 난 사안이 이제 오송역으로 바뀌었습니다.
왜 바뀌었는가 논리를 봤더니 결과적으로 남한의 X축을 오송역으로 삼겠다 하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과거 기본계획에서 정부가 천안아산역이 X축의 중심이 되어서 남북통일시대에, 다시 말씀드리면 TCR, TSR까지 나가는 X축의 중점을 천안으로 삼겠다고 했었던 계획이 바뀌었습니다.
그 원인 중에는, 행정중심복합도시가 변화된 여건의 하나뿐이라고 나는 보고 있고 행정중심복합도시가 됐다고 해서 그 주 이용객인 호남 사람들의 이용 편익을 무시하고 개발의 촉진 정도가, 그 수혜가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호남고속철도가 건설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평가위원회에서 호남 지역 위원들이 퇴장한 가운데 결정하는 과정도 문제였고 번복한 이유도 승복하기 어려운 것이다.
19㎞나 돌아가고 요금도 5800원 더 내고 4분 더 걸리고 이런 것에 대해서 지금 호남 사람들이 납득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 문제를 제가 더 제기하기보다는 몇 가지만 장관께 물으려고 합니다. 분기역 결정과정에 문제가 너무 많았던 것은 추 장관께서 광주 전남까지 가서 설명해서 설득하려고 했었습니다마는 설득이 안 됐다, 여기에 대해 재심의할 용의가 있습니까?
◯건설교통부장관 추병직
없습니다.
◯최인기 위원
없지요? 그러면 지금 우회함으로서 호남 사람들이 동일한 단거리보다도 요금을 5800원 정도 더 내게 된다, 이렇게 되면 하루에 1만 명이 이용하면 결과적으로 1년간 180억 정도 부담을 더 하게 되는데 추가부담에 대해서 요금을 내릴 의향이 있는가요, 없는가요?
◯건설교통부장관 추병직
저희들이 계산할 때는 왕복 4400원으로 나왔는데, 19㎞에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호남 분들의 이용편의라든가 부담 증가액을 감소시킨다는 측면에서 과거부터 추가부담은 없도록 한다는 것이 정부의 원칙입니다, 방침입니다.
◯최인기 위원
그러면 방금 장관 이야기대로 오송역으로 우회함으로서 4400원이 더 추가되는 일이 없도록 요금을 책정하겠다 하는 건설부장관의 약속으로 보아도 되겠습니까?
◯건설교통부장관 추병직
예, 그렇습니다.
나아가 오송분기역 사태는 수 조원의 국가적 자원까지 추가로 낭비하고 말았다.
분명 오송-익산까지의 시나리오가 고속선 건설 거리는 가장 짧았는데, 수 조원의 국가적 자원을 낭비했다니, 무슨 이야기냐고?
- 당시 수서-향남으로 계획만 나오고 있던 수도권고속철도는 분기역 결정 당시에는 안 하겠다고 하다가 결국은 공사 시행을 결정해서 수서-평택으로 개통되었고,
- 수도권고속철도 분기점 - 호남고속철도 분기점 간의 2복선화도 당시 국토연구원의 자료에서는 2045년까지 할 일이 없다더니,결국은 평택-오송 2복선화 공사의 형태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수도권고속철도 분기점 - 호남고속철도 분기점 간의 거리와 오송-익산 간의 거리를 합산하면 앞서도 언급했듯 천안아산에서 분기했을 때보다 길어진다!)
그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고등학생이었던 나의 한이, 지금의 나를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이 블로그도 대학생이 되기 전에 몇 번 갈아엎었지만, 오송분기역 사태 관련 글만 남겼던 초창기 게시물들을 일부러 보존처리(지금으로부터 20년 전임을 반드시 감안하시라. 지금도 잘 못하지만 그때는 표현이 더더욱 정제되지 않았다.) 할 정도였으면 그 한(恨)의 강도가 짐작가지 않나 싶다.
당시 대학 진학에 관해서 행정학을 전공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내가 서울대를 꼭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것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니 사유가 단 하나였다. 정치력(최소한, 인맥)에 대한 강한 갈증.
물론 100%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서울대로 꼭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당시에는 정치학과를 가고 싶었지만, 1학년 때는 공부하는 법을 몰랐기도 했다-_- 그렇지만 방향성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고, 다행히 대학교 1학년 중에 들은 김용창 교수님의 지리학입문 수업은 지리학이 취미가 아니라 전공이 되어도 되겠다는 강한 확신을 심어 주었다.
또한 20대 초반의 나는 교내에서의 따돌림 등으로 인해 망가졌던 10대 시절을 어떻게든 메꾸면서 내 자신을 가꾸어야 했기에, 살아가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정말 많이 겪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오송분기역 사태의 20년이 되는 2025년 6월 30일까지는 어떻게든 잘 왔다고 자평하고 있다.
주전공을 사회학으로 두면서도, 지리학 - 교통학 - 항공교통학 으로 내 생의 목표 중 하나였던 '교통 전문가'라는 큰 틀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와중에 흥미롭게도 '항공교통'이라는 먹거리를 찾았고, 그렇게 들어간 한국공항공사에서의 생활은 이제 막 10년이 지났다.
과연 2035년 7월 1일의 나는 어떤 소회를 남기고 있을까?
그때쯤이면, 정말 어딘가에서 내가 그토록 원했던 일을 하고 있을까?
본격적으로 빛이 나기 시작하려면 정말로 10년은 필요할 거라는 것을 잊지 않았기에, 아직은 그 앞을 알 수 없지만 조금만 더 힘내어 가 보려 한다. 아직 여생은 길고 해야 할 일은 많다.
내가 그토록 바라는 무대에서
다시는 오송분기역 사태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은,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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