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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sonic/생각나는대로

국감을 까보자 - 철도 미승차금액 204억, '불로소득'이라굽쇼?

언제나 그렇지만 국감은 항상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비난 실력을 자랑하는 곳이지요.
철도에 관심을 많이 두고 산 저는 그래서 최근 국정감사를 꾸준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한나라당 유정복 의원이 "미승차인데 환불 안 된 금액이 3년새 204억이다"라면서 열차에 대한 환불체계를 개선하라며 코레일에 대한 맹비난에 나서셨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정말 기가 찬 나머지 저는 이렇게 반박 포스팅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유 의원은 "미승차 시 승차 후 환불 가능 기간이 항공기는 1년, 고속버스는 2일, 그런데 KTX는 길어 봐야 3시간 정도다. 너무 가혹한 거 아니냐"는 말로 이 이야기에 대한 포문을 열었습니다. 그렇지만 실상은 유 의원이 말한 대로 하기에는 상당 부분 무리가 따릅니다.

자. 실상을 볼까요?
철도에는 미승차를 증명할 만한 수단이 없다시피 합니다.

시외/고속버스 표는 표가 두 개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승객용 표와 인환권(기사 혹은 해당 회사 직원에게 제출하는 표)이지요. 이 분들은 차가 출발하기 전 버스 문 앞에 서서 표를 받습니다. 인환권이 없으면 버스 탑승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표에 신분을 명기하거나 하지는 않기 때문에 미승차시 환불 기한이 상당히 짧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항공기의 경우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출발 전에 바코드(혹은 마그네틱 카드)로 승차여부를 확인합니다. 특히나 항공기의 경우는 "신분 확인 후 발권"이 원칙이기 때문에, 혹시라도 사람이 타지 않았을 경우에는 미승차 환불 기한을 넓게 잡아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정말로 안 탔다는데요.

하지만 철도는 사정이 좀 다릅니다.
철도승차권의 경우에는 표 자체에 미승차를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 없습니다. 혹시라도 표를 조금 더 길게 만들어서 '인환권' 개념의 승차권을 만든다고 하면, 열차 이용 시에 표를 전부 확인해야 할 겁니다. 이는 보다 자유롭게 열차 이용을 하도록 하는 분위기[각주:1]에도 역행하는 상황을 만들고, 열차 소요시간 증가에도 한 몫을 할 것입니다. 실제로 유 의원의 생각을 실천에 옮기게 되면, 수없이 타고 내리는 열차에서 승무원이 출입문마다 서서 승차권을 확인해야 하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지고, 역에 정차하는 시간이 5배 이상 늘어날 위험도 있습니다.
물론 승차권, 열차 이용 관련 업무가 전산화되어서 열차에 탑승한 승객들을 보고 미승차좌석을 집어내어 미승차처리 하는 방안도 유 의원의 머릿속에는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지금 상황에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열차승무원들이 승차권이나 좌석 현황에 전수조사를 실시하게 되면, 열차를 한 바퀴 도는[각주:2]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됩니다. 승차권 확인, 그리고 승차-미승차 여부 확인만을 위하여 승객을 위한 다른 서비스(정차역 안내, 긴급상황시 대처 등)들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리고, 철도는 예약부도[각주:3]율이 상당히 높습니다. 예약부도율이 높은 상황에서 승차권을 소지하고 타지 않은 사람에 대한 불이익을 강화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입니다. 그리고 열차 도착 후에도 환불을 일정 부분 시켜 준다면, 열차 출발 전에 누군가 좌석을 전부 점유해서 암표를 팔고, 남은 것을 환불신청하는 악랄한(!) 경우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느 대상에 좋지 않은 점이 있다면 비판해야 함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요소를 충분히 고려하고 비판을 해야 그 의견은 비판으로서의 가치를 지닙니다.
솔직히 국회의원들이 국감에서 코레일에 대해 지적하는 것들은 대부분 합리적이고 국가와 철도 모드에 득이 되는 비판이라기보다는 자기 인지도와 인기를 상승시키기 위한 비난이었습니다. 국회의원이 바뀐 후 열리는 다음 국감부터는 상대의 입장은 고려해 가면서 비판하는 국회의원들이 국감을 맡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 예전에는 실제로 열차를 탑승하러 가기 전에 표에 '펀칭'을 하기도 하는 등 출발/도착 시 표 확인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2005년 7월 15일 부로 "자유로운 여행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명목으로 출발/도착 시 표 확인이 폐지되었습니다. 물론 일부 KTX 정차역들에서 자동개표기의 등장, 또 홈티켓/SMS티켓 등의 셀프티켓 서비스 확대도 출발/도착 시 표 확인을 하지 않는 원인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본문으로]
  2. 물론 무궁화호 기준으로는 3량에 1명을 배치합니다. 하지만 만약 좌석에 입석까지 꽉 찼을 경우에는 (72 + 36) * 3 = 324 명의 승차권을 확인해야 합니다. 1명당 10초로 계산해도 54분이 나옵니다. 정차역 사이의 소요시분은 보통 10~20분임을 생각해 본다면 어마어마하지요? [본문으로]
  3. 좌석은 점유해 놓고, 안 타는 걸 말합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