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맛같았던 잠. 우리의 일정은 그만큼이나 힘들었다. 어디서 듣기로는 교통수단을 이용해 3시간을 넘게 이동하면 피로가 쏟아진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건 뭐. 하루 종일 기차만 타고 이동하는 여행이다 보니 당연히 자는 게 꿀맛같을 수밖에.
일어나 보니 05시 15분이었다. 바깥 창에서는 전날 목포 가는 길에서 차창 밖에 보이던 모습이 그대로 펼쳐진다.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마구 쏟아지고 있어서, 결국 여기에서 처음으로 펴기 싫었던 우산을 펴고 말았다.
05시 35분경 여관을 나서서 목포역으로 갔다. 목포역 앞 김밥집에서 김밥 두 줄씩을 사 들고, 목포역에서 몇 가지 기록 사진들을 찍고 우리는 또 다시 열차에 올랐다. 계속되는 장거리 이동에 진수성찬은 정말 사치다.
열차에 오르기 전, 목포역에서.
이번에 타는 열차는 목포에서 부전까지 가지는 않고, 순천까지만 간다.
이 때 당시, 단일 열차의 운행거리가 너무 길다는 이유로 목포 - 부전 간을 운행하던 경전선 열차의 운행구간이 부전 - 순천 / 순천 - 목포로 반토막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만일 목포 - 부전 간의 전 구간을 운행하는 열차가 있었으면 아마 9시간 동안 근성으로 열차를 타고 가는 그런 스케줄을 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우리의 체력은... 하늘나라로?)
간밤에 정말 비가 많이 내리기도 했거니와, 열차 안에서도 계속 비 구경만 하게 되니 2일차도 비와 친구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나가다 만나는 하천이나 강들을 보면 거의가 물이 불어 있는데다가 흙탕물이었고, 이 열차를 완승하는 동안 비가 그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영산강을 건너면서. 이미 물이 많이 불어 있다.
이 열차가 지나는 구간은 애초에 사람들이 뜸하게 탄다. 덕택에 이 구간에서 좌석 승객이 들어올까 걱정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사람이 잘 타지 않는 구간이라는 것은 이미 여러 동호회 등에서 검증이 된 상태였다.
그랬기에 애초에 목포역에서 우리는 맨 뒷칸인 4호차의 맨 뒤쪽애 자리를 잡고 좌석을 돌려서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그리고 노트북으로 실시간 여행 기록도 작성했다. 난 기록지를 쓰는 습관을 들이지 않기에.
처음에는 목포에서 우리를 포함해 4명이 4호차에 타고 있었는데, 서광주를 지나고 나서 다시 한번 객차 안을 살펴 보니 우리는 어느 새 객차를 전세내고 있었다. 화순을 지나고 나니 4호차에 승객이 들어와 전세 상태는 해소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정말로 열차를 별로 이용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렇지만 보성, 조성, 득량 등지에서는 경전선 서부구간답지 않게 승하차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보성역. 은근히 승하차가 많았다. 녹차 다원 때문일까.
비 오는 날에 사진을 찍고, 또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첫째날부터 아주 피곤한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역마다 내리면서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기려고 움직이자니 몸이 무거웠다. 덕택에 정차역 중에서 이양역의 사진은 귀찮아서, 명봉역의 사진은 자느라 빼먹고 말았다. 이 구간에서 찍었던 다른 사진들은 내 사진 DB(?)를 위한 것이었기 떄문에 올리지 않았다. 제대로 나오지 못한 사진들까지 있으니, 굳이 올릴 이유는 더더욱 없다. 쩝.
순천에 도착하자 우리는 남은 시간을 이용해 역 앞 편의점에서 과자와 바나나맛 우유를 사는 등의 간단한 보급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전라선 열차를 타고 서대전으로 올라갔다.
순천에서 역무원 분에게 서대전까지의 좌석현황을 조회해달라는 요청을 해 보았으나 잔여석은 제로. 역시 문제는 그 날이 일요일이었다는 것이다. 덕택에 여수, 순천에서 서울행 교통량이 많긴 많았다.[각주:1] 사실, 휴일이 아니라도 순천에서 상행 열차를 엄청나게 많이 타기는 한다지만, 좌석 0이라니. 정말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순천에서 탑승객이 이 정도는 된다. 내일로 티켓을 사용하는 입석승객 입장에서는 참 무섭다.
그래도 여수, 순천에서 탄 승객들이 좌석을 전부 채우지는 못한다. 다행히 우리 눈에 빈 자리가 보였다. 그래도 웬만하면 앉아 가야지 싶은 생각에 일단은 2호차 통로에 있는 화장실과 객실 출입문 사이 틈에 짐을 넣어두고 귀중품만 챙겨 출입문 바로 앞의 좌석에 앉았다. 입석이라 자리 주인이 나타나면 언제든지 비켜 줘야 한다는 사실과, 우리 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계속 보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우리 둘을 압박한다. 좌석의 주인이 나타나면 앉으려고 가방을 놓아두었던 자리에 어느 할머니가 와서 가방을 조금 치워 놓고 자신의 가방을 놓아두었다. 덕택에 우리는 좌석 승객이 오지 않았는데도 곡성에서 좌석을 나와 입석 생활에 돌입했다. 준비해 둔 신문지를 깔고서 책 보기. 입석 승객의 기본 기술인데, 이제까지 언제나 먼저 예약하고 좌석으로 승차하는 편이었으니 이걸 써먹은 건 이 때가 처음이었다. 신형 객차여서 통로가 상당히 넓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객차 승강 계단에 앉거나 하는 등 굉장히 힘든 상황을 견뎌야 할 뻔했다. 비도 맹렬히 창가를 때려대고, 그러면서도 나와 치요아범 둘 다 책 읽다 자고-_-;; 전날 여관에서 몇 시간 자고서도, 또 경전선 열차에서도 틈틈이 자 놓고서도 힘들긴 정말 힘들었다. 깨어 보니 전주, 또 깨어 보니 익산, 또 깨어 보니 논산... 이런 상황이 반복되었다.
열차가 익산까지 가는 과정에서 지연되었기 때문에 목적지인 서대전역에 정시 도착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열차는 다행히 서대전에 정시에 도착했다. 서대전역을 나오니 다행히 빗줄기가 많이 약해져 가랑비만 내리고 있었다.
아니, 전국의 철도를 완주하는 이번 여행의 목표가 이것 때문에 수포가 되는가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태백선은 일단은 우리의 계획상으로는 4일차에 지나갈 곳이었다. 상황이 어떻게 되었든 우리의 여정은 계속되어야 했다.
서대전역 맞이방 의자에 앉아 무선인터넷을 이용해 1일차의 기록을 블로그에 업로드한 후, 열차 시각이 다가와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플랫폼으로 내려가서 열차를 기다리는데... 에엣?! 기관차가 7318호다! 레이디버드[각주:2] 견인 전용 기관차인데 이게 왜 전라선 정규열차에 내려온 걸까...
아니, 일명 ‘욱일승천기 도색’으로 악명 높은 레이디버드 견인 기관차 아닌가...
열차에 오르고 나니 또 좌석이 꽉 차 있고, 거기에 입석까지 있었다. 하지만 우연 하나가 우리의 여행을 지겹지 않게 만들어 주었다. 여행을 마치고 순천으로 돌아가는 KTF Think Korea 5기생 2명이 있었던 것이다.[각주:3]
Think Korea 배지를 보고서 나는 ‘어, 몇 기인가요?’라는 말을 꺼냈다. 5기라더라. (필자는 Think Korea 2기였다.) 덕택에 Think Korea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에피소드에 대한 이야기 등등으로 순천까지의 3시간은 굉장히 빨리 지나갔다. 곡성까지는 객차 통로에 앉아서 이야기를 했는데, 곡성에서 4자리가 나서 바로 좌석으로 옮겨서 이야기를 계속햇다. 하지만 이 자리는 구례구까지밖에 잡을 수 없었다. 구례구에서 4명의 좌석승객이 승차했으니 말이다.
정말 오지게 자리가 안 났지만, 순천을 지나니 절반 이상 내려서 결국은 괜찮은 좌석이 났다. 덕택에 순천에서 여수까지는 별 무리 없이 열차를 타고 이동할 수 있었다.
괜찮은 사진을 찍는 것도 이번 Railro Project 2007의 목적이기도 했는데, 덕양역을 지나면서 굉장히 좋은 구도에서 사진을 찍으려 시도했으나 실패한 것이 좀 뼈아팠다. 그 사진에 대해 아쉽다는 생각을 하다가 어느 새 여천을 지나고, 만성 임시승강장쯤 오니 보이는 바다는 참으로 멋있었다.
순천에서 반 이상 빠졌다지만, 여천역도 하차하는 승객들이 굉장히 많았다.
만성리 해안이다. 이제 정말 바다가 보이는구나.
만성리 해안을 지나고, 또 바로 앞에 바다가 보이는 풍경을 지나며 보니 이제 정말 여수에 왔다는 것이 느껴졌다. 여수역에 발을 디디니 느껴지는 바다 내음까지. 아. 정말 바다구나.
거기에서 기록을 위해 7318호 기관차의 사진을 몇 장 찍고, 또 여수역의 사진을 찍고서 순천으로 돌아가기 위해 바로 승강장으로 돌아왔다. 시간이 있으면 만성리 해안에서 좀 쉴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그러기에는 짜 둔 스케줄이 너무 촉박했다.
또다시 7318호.
여수역 승강장.
여수역을 나와서 여수역사를 찍어 보았다.
S14. #1132 (여수 18:20 → 순천 19:00) \7,500 / 39.8km
#1132(여수 → 용산). 출발 대기중. 나름 컨셉.
사실 이 열차에서는 별 이야기가 없었다. 새마을호 열차기는 했지만 콘센트가 없었떤 덕분에 무언가를 충전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리고 또 다시 배터리가 다 되어 (...) 치요아범의 디카를 쥔 나는 한 가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어차피 플래시가 안 터질 것이라 판단했던 나머지 덕양역에서 유조차를 찍는 것을 다시 시도했는데, 번쩍 하고 플래시가 터져 버린 것이다. 주변 승객들이 놀라는 덕분에 필자는 굉장히 부끄러워해야 했다. 이런 사고가 있은 이후에는 조용히 휴식을 취하면서 이동하였다. 순천에는 정시에 도착하였다.
S15. 순천에서
순천에서 지인 한 분을 만나려 했었다. 하지만 전날까지 거제도에 갔다 온 후 상태가 좋지 않다고 나올 수 없다고 말을 하시더라. 그래서 맛있는 집이라도 추천해 달라는 말을 했더니, 순천역 로터리에 있는 농협 뒷골목의 '흥국식당'이라는 한정식집을 추천해 주었다. 그곳에서 8,000원짜리 정식을 시켜 저녁을 먹었는데, 역시 전라도라 그런지 정말 푸짐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와서 찜질방으로 가려는데 찜질방보다 조금 더 간 사거리쯤에 보이는 이마트. 내일 열차 안에서 먹을 과자와 음료수를 사기 위해 이마트에 들어가 쇼핑을 했다. 쇼핑을 마치고 난 뒤에는 무선인터넷이 잡히는 곳을 잡아 노트북으로 인터넷 서핑과 여행기의 편집을 어느 정도 하였다. 다음날 부산에서 친구를 만날 약속도 잡고. 하지만 쇼핑 자체보다는 노트북으로 여행기를 쓰는 일에 시간을 더 잡아먹은 것 같다. 덕택에 치요아범에게 잔소리를 심하게 들었다. 에휴.
그리고는 찜질방에 들어가서 목욕을 하고 찜질방 몇 개를 이용한 후 잠이 들었다. 하지만 찜질방에서 잔 것이 충분한 휴식이 되지는 못했다. 수면실 내부의 온도가 33도였기 때문에 자다가 몇 번은 깨고 말았으니 말이다.
순천에서 고속도로를 이용해 서울로 가려면 "광주를 돌아서" 가야 하다 보니 기차와 버스의 소요시간 차이가 별로 없다. 그래서인지 순천은 철도가 우세하다. 게다가 여수의 경우는 아직까지 연결된 고속도로가 없다. [본문으로]
관광열차차, 그리고 전세열차로만 투입되는 열차이다. 옛 무궁화호 특실 차량을 개조한 차량이다. [본문으로]
KTF Think Korea는 KBS 도전 골든벨에서 Think Korea 문제를 맞힌 학생을 대상으로 해외 역사탐방을 보내 주는 프로그램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