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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멀리 떠날때/170619 Japan

2. 일본의 욕심은 끝나지 않았다 (2) 왓카나이 - 소야 곶

일본 여행의 두 번째 포인트는 왓카나이稚内였습니다.


앞서 다루었던 네무로처럼, 왓카나이도 가는 데도 하루를 다 써야 합니다.

삿포로札幌에서 출발하는 특급 소야宗谷가 하루 1왕복 다니고, 아사히카와旭川에서 출발하는 특급 사로베츠サロベツ가 하루 2왕복 다닙니다.

삿포로에서 한번에 갈 수 있다는 것은 다행이지만, 이것도 시간이 무지막지하게 걸리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특급 소야를 타고 5시간 10분. 게다가 중간중간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는 곳까지 있습니다.



왓카나이역稚内駅은 일본 최북단 역입니다.

5시간 반을 달려올 가치가 많다고 생각들 하는 모양이에요. 많은 여행객들과, 많은 철도 오타쿠들이 있습니다.

일본 최북단 역이니만큼, 일본 각지의 역까지 가는 거리가 각각 다 붙어 있습니다.

심지어 일본 최북단 역이라는 특성을 이용해서 일본 최남단을 지나는 노선의 종점인 마쿠라자키枕崎역과는 자매결연까지 맺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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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역은 신기한 게, 한번 리모델링을 하면서 리모델링 전의 선로 종단점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역이 휴게소 겸용입니다. 도로의 역道の駅이라고 부르는데, 일본 국토교통성 인증 공식 휴게소입니다.

왓카나이 휴게소 소개 (일본어)



사실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왓카나이역이 아니라, 소야 곶宗谷岬이었습니다. 정말 일본 최북단 말입니다.

소야 곶으로 가려면 역과 같이 있는 터미널에서 승차권을 발권해서 버스에 타야 합니다.

웬만하면 왕복 승차권을 구매하는 것을 권합니다. 역시나 여기도 왕복 승차권이 승차권 없이 타는 것보다 쌉니다.

그리고 회수권 개념으로 승차권이 있고 나머지가 있는지라, 승차권 2개를 다 쓰면 나머지가 기념품이 됩니다.

문제는, 소야 곶으로 가는 모든 버스는 소야 곶이 종점이 아닙니다!

그리고 소야宗谷라는 정류장과 소야 곶宗谷岬은 다른 정류장입니다! 정신 놓지 마세요...

여기도 네무로처럼 버스가 드물게 다니니 시각표를 잘 확인하고 일정을 짜야 합니다. 소야 버스 홈페이지 (일본어)



소야 곶을 둘러보는 데는 사실 1시간 잡으면 충분합니다.

제 일정은 13시 20분 오토이넷푸音威子府행 버스를 타고 14시 10분경 소야 곶에 내려서 이곳저곳 둘러보다가, 15시 01분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일정이었습니다


소야곶 공원宗谷岬公園은 크게 두 지역으로 나뉩니다. 바닷가와 언덕 위가 약간 성격이 다릅니다.

일본 최북단이면서 동시에 사할린이 가까운 곳이다 보니, 소야 곶에 관련된 노래비라든지, 주변 지형에 대한 설명 등이 많았습니다.

이곳에서 반대편인 사할린(일본명 가라후토樺太)의 쿠리리온 곶(일본명 니시노토로 곶西能登呂岬)까지는 43km 떨어져 있습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사할린이 일본 영토였던 시절을 추억하는 상징물들이 꽤 있다는 것입니다.

1945년 일본의 패전 전까지만 해도 북위 50도 아래의 남사할린은 일본령이었지만,

패전과 함께 사할린은 그대로 러시아 땅이 되었고 일본은 사할린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는 포기한 듯합니다.

네무로 쪽의 남쿠릴 열도 4개 섬과는 달리 이곳에는 "저기 일본땅인데..."라고 주장하는 듯한 문구는 거의 없더군요.

좀 거슬리는 게 일본 최북단의 땅 비석에 대한 설명인데,

この碑は、現在、私たちが自由に往来できる日本の領土としては最も北に位置する宗谷岬の突端、北緯45度31分22秒に建てられています。

이 비석은 현재 우리가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는 일본의 영토로는 가장 북쪽에 위치한 소야 곶의 끝자락, 북위 45도 31분 22초에 세워져 있다.

이건 다르게 말하면 '자유로이 왕래할 수 없는 일본의 영토가 있다'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부분입니다. 저는 이것을 일본이 사할린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했다고 해석했습니다.


소야 곶에는 일본 최북단의 땅 비석과 함께 사할린이 섬인 것을 처음으로 확인한 탐험가 마미야 린죠間宮林蔵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하기야, 그들에게는 추억이겠죠.



위쪽의 소야 공원으로 올라가 보았습니다. 올라가는 길에 마침 뭐가 있길래 들어가 봤는데... 역시나...

일본의 사할린에 대한 추억, 그리고 영토에 대한 심한 집착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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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를 둘러본 후 언덕 위로 올라가 보았습니다. 공원이 펼쳐져 있습니다.

곶이다 보니 등대는 필연적으로 있네요. 일본 최북단의 등대 소야곶 등대가 있고, 그리고 이곳을 대표할 만한 각종 상징물들이 공원에 놓여 있습니다.

가라후토[각주:1]를 여행하고 온 시인이 가라후토로 가면서 썼다는 시,

그리고 홋카이도와 사할린 사이의 해협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라페루즈 백작을 기념하는 조형물, 



언덕 아래를 바라보면 이런 풍경이 펼쳐집니다. 일본 최북단이기 때문에 수많은 관광버스들이 오고 갑니다.

역시 흐린 날이라 사할린은 보이지 않지만, 일본 최북단에 도달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지,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들렀다 가는 풍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전 이곳에서 일본의 '평화'에 대한 정의에 때문에 기겁했습니다.

일단, 평화의 종에 대해 실려 있는 설명은 아래와 같습니다. 일본어 원문


世界平和の鐘:世界の恒久平和を願うモニュメントとして昭和63年(1988年)に建てられました。世界平和の鐘は、1号鐘が国連本部、2号鐘がここ宗谷岬公園、3号鐘が沖縄県石垣市にそれぞれ設置されています。

세계평화의 종 : 세계의 항구적인 평화를 바라는 기념물(Monument)로 1988년에 지어졌다. 세계 평화의 종은 1호가 UN본부에, 2호가 여기 소야곶 공원에, 3호가 오키나와 현 이시가키 시에 각각 설치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만한 평화는 그저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상태'인데, 이것을 깨트릴 만한 기념비가 하나 더 서 있습니다.

"평화의 비平和の碑"인데, 설명이 이러합니다.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1943년(昭和18年) 10월, 여기 소야 곶 연안에서 구 일본 해군의 공격으로 미군 잠수함 와후 호가 승조원 80명을 태운 상태에서 침몰하였다. 그렇지만 이 배는 일본해[각주:2]를 따라 북상하면서 시모노세키-부산 연락선 곤륜호(콘론마루, 崑崙丸)를 시작으로 상선 등을 공격하여 다수의 일본인 희생자를 발생시켰다. 이 비는 전후 50년이 지난 1995년(平成8年)에 일본-미국 양국의 사람들이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을 위로할 목적으로 합동으로 건립한 것으로, 평화를 원하는 양 국민의 소원이 담겨 있다."


....네? 뭐라구요?

심지어는 와후 호의 공격으로 인해 희생된 배들과 희생자들 수를 같이 정리해 놓았습니다.

뭔가 앞뒤가 안 맞는다는 게 느껴지지 않나요? 평화를 이야기하면서, 실제로는 자국민이 억울하게(?) 죽지 않는 상태가 평화라는 겁니다.


문제는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나라라는 겁니다. 전쟁을 일으켰으면서 자국민의 피해가 없기를 바라는 것부터가 모순 아닐까요.

이런 일본의 피해자 코스프레는 히로시마 원폭 돔原爆ドーム에서도 볼 수 있었고[각주:3], 이외에도 일본의 전쟁 관련 사적지에서 뺴놓지 않고 볼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왠지, 커티스 르메이 장군의 명언이 생각나네요.

There are no innocent civilians. It is their government and you are fighting a people, you are not trying to fight an armed force anymore. So it doesn't bother me so much to be killing the so-called innocent bystanders.[각주:4]

"무고한 민간인이란 없다. 이들은 그들의 정부와 함께 우리와 싸우는 민중들이며 우리는 더 이상 무장한 적들하고만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소위 '무고한 방관자들'을 죽이는 것은 나를 괴롭게 하지 않는다."

    물론 전투와 관계없는 민간 상선을 공격하는 것은 전쟁법에 어긋나는 일이겠습니다만,

    .....일본이 진주만을 어떻게 공격했더라? 난징 대학살은? 충칭 대공습은? 앞뒤가 안 맞죠?



    다만, 이곳에 잊어서는 안 될 위령비가 하나 있습니다.

    대한항공 007편 격추사건의 위령비가 바로 여기 소야 곶에 있습니다.


    당시 일본인들도 상당수 타고 있었고, 소련이 당시 적성국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접근이 가능한 가장 가까운 곳인 소야 곶에 위령비가 세워진 모양입니다.

    희생자 명부에는 한국인, 일본인, 그리고 기타 외국인들의 이름도 눈에 띄었습니다.

    저 기념비 가운데의 '기념의 종'은 종을 건드리면 칠 수가 있어서, 저는 종을 세 번 치고 조용히 묵념하고 왔습니다.


    이제 돌아갈 시간. 여기는 버스정류장 옆의 매점 '에조야'에서 도달 증명서를 100엔에 판매합니다. 시 차원에서 따로 챙기는 건 없고요.

    증명서를 사겠다고 하면 기계로 시간을 찍어 준 다음, 스탬프를 알아서 찍으라고 합니다.

    이외의 기념품도 있었는데, 뭐가 있다는 것을 찍을 만한 여유가 없었네요.

    버스 시간이 임박한지라, 급히 스탬프를 찍어 돌아오는 버스에 올라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렇게, 일본 동쪽 끝과 북쪽 끝을 갔다오면서 별 걸 다 느끼게 되네요.

    다음에는 일본철도 4극단 제패와 일본 국내선 비행기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당시 명칭으로 썼습니다. [본문으로]
    2. 원문 표현에 따름 [본문으로]
    3. 여긴 좀 심각합니다. 일본어판과 영어판의 설명이 완전히 다를 정도입니다. 일본어판에서는 자기네들이 억울한 피해자라는 것만 강조하나, 영어판에서는 일본의 책임 문제가 나오더군요. [본문으로]
    4. Sherry, Michael (September 10, 1989). The Rise of American Air Power: The Creation of Armageddon, p. 287 (from "LeMay's interview with Sherry," interview "after the war," p. 408 n. 108). Yale University Press. ISBN-13: 978-0300044140. Wikiquote를 통하여 인용함. [본문으로]